■ 어법주닛켄상인예하 어지남

여법(如法)의 수행(修行)

 

  『諸法實相抄(제법실상초)』의 마지막에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行學) 끊어지면, 불법(佛法)은 없느니라. 나도 다하고, 남도 교화(敎化)하시라. 행학(行學)은 신심(信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로다. 힘이 있다면, 일문일구(一文一句)일지라도 말씀하실 지어다.」(어서 668)
라는 어문(御文)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행학(行學)이라는 것 속에, 힘이 있다면 한 문장 한 구절이라도 설해 나간다고 하는 것, 여기에 행학의 이도(二道)의 결론으로써, 즉 우리들이 일상에서 불법을 행하는 가장 근본의 마음가짐이 명시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그것을 그냥 자기 머리 속에만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존귀한 불법의 의의를 비록 한 마디라도 남에게 설해간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소중하며 그것이 올바르게 불법을 행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는 어서 중에 『日妙聖人御書(니치묘성인어서)』라는 어서가 있습니다만, 이 어서의 첫 부분에 요법범지(樂法梵志)에 대한 이야기가 설해져 있습니다.  옛날 요법범지라는 성자(聖者)가 있었습니다.  요법범지가 여기저기에서 진지하게 법을 구하고 있던 중 어느 사의사법(邪義邪法)의 바라문을 만났습니다. 그 바라문은 “너의 가죽을 벗겨서 종이로 하고, 뼈를 부러뜨려 붓으로 하고, 골수를 빻아서 먹으로 하고, 피를 물로 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쓴다면 존귀한 법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요법범지는 항상 법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법을 듣고 싶어서 바라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가죽을 벗겨서 종이로 하고, 뼈를 붓으로 하고, 골수를 빻아서 먹으로 하고, 피를 물로 하여 그 말을 적으려고 준비를 하였더니 그 사의사법의 바라문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속고만 요법범지는 의지 할 곳도 없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에 엎드려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신 부처님께서 그 앞에 나타나 스무 자의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여법(如法)은 마땅히 수행(修行)할 지어다. 비법(非法)은 행(行)하지 말지어다. 금세(今世) 혹은 후세(後世), 법(法)을 행(行)하는 자(者)는 안온(安穩)하느니라.[여법응수행(如法應修行), 비법불응행(非法不應行), 금세약후세(今世若後世), 행법자안온(行法者安穩)]」<日妙聖人御書(니치묘성인어서) 어서 603>
라는 스무 자입니다.  이것을 들은 요법범지는 과거의 숙연도 있었겠지요, 그 자리에서 성불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어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역시 「여법(如法)을 수행」해야 합니다.  여법이란 즉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의 「여(如)」라는 글자에 「법(法)」이라 써서 「여법」이라고 합니다. 세간에서도 「여법의 모습」이라는 것을 흔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이른바 여시(如是)의 법(法)이며 그것은 진여(眞如), 진실(眞實)의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법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법이 아닌 것, 즉 「비법(非法)」은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三惡道)로 떨어져 가는 길이므로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비법의 종교 혹은 비법의 행의 모습이 이 세상에는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여러 입장에서 고뇌하고, 또 그 올바른 해결의 길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의 「금세(今世) 혹은 후세(後世)」란 「현당이세(現當二世)」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들의 생활, 그리고 또 미래를 향해서, 이 미래는 죽을 때까지의 일도 미래이지만 다시 죽은 후에도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의 불사의(不思義)한 인연상속(因緣相續)에 의해 우리들에게는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미래 속에서도 정말로 「금세 혹은 후세」, 즉 현당이세에 걸쳐 진실로 법을 행하여 가는 사람은 반드시 안온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온이라는 것은, 안락이야말로 부처의 모습, 또 부처의 모습은 즉 안락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법을 행하는 곳에 「금세 혹은 후세」 현당이세에 걸친 안락이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법을 행한다.」는 것은 법을 믿는 것에서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법을 믿는 사람에게만 현당이세에 걸친 안온함이 있고, 또한 그 법을 배우는 사람에게 현당이세의 행복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2004년 6월 5일, 6월 광포창제행 때, 총본산 객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