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법화

신심즉생활(信心卽生活)

한국담당교사
다케야쓰 리키도 어존사
武安 力道 御尊師

  우리들이 평소에 알무런 생각없이 사용하는 말 중에 "저 사람은 신심이 없다."라든가 "신심이 강성하다."는 것들이 있는데, 과연 우리들 범부가 '신심이 있다, 없다.'를 알 수 있는 것일까요. 평소에 우리들은 조석근행을 하고 제목을 부르며, 어강(御講)에도 참예하고, 본산에 등산도 하며, 나아가서는 조직의 모임에도 열심히 참가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이 사람은 신심이 있다고 간주하겠지요. 그러나 신심이라는 것은 이런 것, 저런 것을 했기 때문에 그걸로 신심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생활을 예로 들어 보면, 생활이란 하루 24시간이 그 범위입니다. 그 중 어느 곳의 일부분을 보더라도 생활이 아닌 시간대는 없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 시간대만 생활인 것이 아니며, 놀고 있는 시간도, 잠들어 있는 시간도, 식사를 하고 있는 시간도, 목욕을 하고 있는 시간도 모든 것이 생활인 것입니다. 즉 생활이 아닌 시간은 없습니다.
  잠이 안 와서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은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식사를 잘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생이라면 진학 때문에 고민하고 젊은 사람이라면 일과 연애로 고민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연대별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바람과 고뇌도 각양각색입니다. 백 명이 있으면 백 명이 각각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강(御講)에 함께 참예하여 모두 똑같이 신심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원을 나서면 각자 자기의 생활이 있으며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이란 24시간 전부를 가리키며 근행과 창제를 하는 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가정에 돌아와 단란하게 지내는 것도, 혹은 말다툼을 하는 것도,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신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쨌든 근행, 창제만 하고 있으면 그걸로 "신심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신심의 일부이며 결코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행 창제가 신심의 일부이고 신심하는 형태의 하나라고 해서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중요한 형식이기 때문에 게을리 하지 말고, 힘써서 행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신심이란 언제나 자기는 이대로 좋은가 라는 반성과 본존님에 대한 갈앙연모의 자세입니다. 그러한 신심의 내면은 반드시 외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면에 신심이 있으면 형태로서 근행 창제는 자연히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대성인님께서는 어서에서
「법화경(法華經)의 법문(法門)을 들음에, 더더욱 신심(信心)을 힘씀을 참된 도심자(道心者)라고 하느니라.」[上野殿後家尼御返事(우에노전미망인답서) 어서 337]
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의 이야기를 듣고 더욱 신심에 힘쓴다, 바로 이것을 진실한 도심자(道心者)라고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늦게 돌아와 피곤하게 처져 있다든지,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든지, 친구들에게 배신당해서 풀이 죽어 있다든지, 실로 다양한 일이 이유가 되어서 근행을 할 마음이 안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간단히 '오늘은 그만두자.'라던가, '오늘은 건너뛰지.'라는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면 자신에게 져 버려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에는 주위에서 법문(法門)을 설 하여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이 정도로 자기한테 져서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일 정도로 기운이 빠져서 본존님께 화풀이를 해서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은 「신심즉생활」을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란 어디에다 갖다 붙인 것 같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 그 자체입니다. 『일련정종요의(日蓮正宗要義)』에 「불법과 세법」의 항목에서는 「생활 속에 있으면서 언제나 불법에 대한 신심을 원점으로 하여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오며, 또 여기에서 나서서 세간의 직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뿌리가 있는 초목처럼 흔들림이 없다. 한편 불법을 믿지 않은 사람의 세간법이나 좁고 유치한 경험에 의한 생활은 뿌리가 없는 초목처럼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르는 결과로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누구에게나 그 세간의 생활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이며 근본이다.」(일련정종요의 346)라고 나와 있습니다. 희로애락의 전부는 그야말로 생활 속에 있으며 생활에서 벗어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심과 생활은 그 자체가 이어져 있습니다. 절복을 하는 것에서도 그것은 생활을 영위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생활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신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때로는 기분이 시들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를 위해 자신을 다그칠 재료가 필요합니다. 수량품에 「所作佛事(소작불사) 未曾暫廢(미증잠폐)」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작(所作)의 불사(佛事), 아직 일찍이 잠시도 폐하지 않았느니라.」라고 풀이합니다. 부처께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작업을 멈추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아주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구원겁래(久遠劫來)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단왕(檀王)이 아사선인(阿私仙人)에게 천세급사(千歲給仕)를 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급사라는 불도수행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일은 스승을 모심보다 뒤떨어지지 않느니라.」라고 합니다만, 그것을 천년간 게을리 하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단왕도 인간인 이상 신심에 내키지 않는 일도 있었을 터인데, 언제나 「정존묘법고(情存妙法故) 신심무해권(身心無懈倦)」[법화경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이라고 나와 있는 것처럼 「마음에 묘법(妙法)을 지녔던 고로, 신심(身心)에 게으름도 지침도 없었으며」라는 문구를 외며 극복했습니다.
  부처님이나 단왕 정도까지는 안되더라도 이런 것들을 자극으로 하여 고민이나 괴로움,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해 가야만 정말로 신심이 있는 것입니다. 신심을 강하게 하는 재료는 생활 그 자체 안에 있습니다. 신심을 생활 제일의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기둥으로 삼아 생활이 짜여져 간다면 틀림없이 갈앙연모의 마음이 조금씩 연마되어 갑니다. 그리고 대성인님께서 말씀하신
「고(苦)를 고(苦)라고 깨닫고, 낙(樂)을 낙(樂)이라고 열어서,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계시라.」[四條金吾殿御返事(시죠킹고전답서) 어서 991]
라는 성의(聖意)를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배수(拜受)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