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법주닛켄상인예하 어지남

난죠 도키미쓰(南條時光)의 신심(信心)

 

  오늘 5월 1일은 총본산(總本山) 다이세키지(大石寺)의 개기단나(開基檀那)인 난죠 도키미쓰(南條時光)님, 법호(法號)ㆍ다이교존령(大行尊靈)의 상월명일(祥月命日)로써 조금 전 오전 7시부터 당(當) 객전(客殿)에서 그 법요를 집행한 바입니다. 여기에 와 계시는 분 중에서도 상당수의 분들이 이 법요에 참가하였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난죠 도키미쓰님은 지금부터 674년 전인 겐코(元弘) 2년(1332)의 5월 1일에 서거하셨습니다. 『法華初心成佛秒(법화초심성불초)』에
「훌륭한 스승과 훌륭한 단나(檀那)와 훌륭한 법(法)과, 이 셋 서로 어울려 기념을 성취(成就)하고, 국토(國土)의 대난(大難)도 없애는 것이로다.」(어서 1314)
라는 어지남(御指南)이 있습니다. 저는 두 번에 걸친 몽고 침략의 대국난(大國難)도 『立正安國論(입정안국론)』 이래 일본국에 대한 침략의 사실에 대해서 예언을 하신 대성인님의 대자대비 본불의 경계, 그 공덕으로써 일본국이 안태(安泰)하게 가호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으로써의 대성인님 불법을 올바르게 우러러서, 만대에 걸쳐서 이 정법의 호지(護持)를 뜻하신 유일한 단나이신 난죠 도키미쓰님ㆍ다이교존령의 커다란 공덕을 절실하게 느끼는 바입니다.
  겐지(建治) 년간(1275~1277)부터 아쓰하라 법난(熱原法難)이 야기되어 고안(弘安) 2년(1279) 9월 21일의 「벼 베기 사건」을 빌미로 20명의 아쓰하라 법화신도가 이유도 없이 가마쿠라(鎌倉)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압에 대해서 조금도 법화의 신심을 깨뜨리는 일없이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에 진시로(神四郞)ㆍ야고로(彌五郞)ㆍ야로쿠로(彌六郞)의 세 분께서,필시 고안(弘安) 2년(1279) 10월 15일에 참수를 당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확실한 처형일은 문헌(文獻)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하고, 특히 『聖人等答書(성인등답서)』 등의 어문(御文)이나, 11월 6일에 대성인님께서 난죠 도키미쓰님에게 주신 『龍門御書(용문어서)』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필시 이때에 이미 참수를 당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종문의 모든 사실(史實) 등의 연구를 거쳐 발간된 『후지년표(士年表)』라는 연표에도 그와 같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바입니다. 당시, 즉 고안 2년(1278)에 우에노(上野)의 향주(鄕主)로서 대성인님의 불법을 수호하고 신앙하신 도키미쓰(時光)님은 연치(年齒) 불과 21세였습니다. 그러나 우에노의 향주로서의 처지에서 아쓰하라 방면의 법화신도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온갖 박해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옹호하셨던 것입니다. 또 신앙 상에서 어쩔 수 없이 있을 수 없게 된 신관(神官)들도 한때 보호해 주신 일도 있어서(주:아쓰하라(熱原) 신후치신사(新福地神社)의 신관이 대성인의 신앙에 귀의하여 그 용맹스런 신앙 때문에 교치(行智) 등의 노여움을 샀다. 이 신관도 도키미쓰님의 보호를 받았다.) 이러한 음으로 양으로 걸친 모든 면에서의 정법호지(正法護持)의 행실 때문에,당연히 가마쿠라 쪽의 방법(謗法)의 관헌, 혹은 이 지방의 방법의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일관되게 이 법화경의 신앙과 함께 정법호지에 정신(挺身)하신 것이 당시의 난죠 도키미쓰님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무시바라이대법회(蟲佛大法會)에서도 약간 말씀드렸는데, 『龍門御書(용문어서)』에는 받는 사람이 「난죠 도키미쓰(南條時光)님」이 아니라 「우에노 현인(上野賢人)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현(賢)」이라는 글자는 「어질다」라는 글자입니다. 세간 일반적으로 어질다는 말은 사용합니다만, 불법상의 경계에서  이「현(賢)」이라는 글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의가 깊은 것입니다. 「현(賢)」에 상대되는 「성(聖)」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더욱 한 단계 위가 됩니다만「현성(賢聖) 」이라는 숙어도 있습니다. 이 「현인」,「성인」이라는 것은 불법 상에서 정말로 사리(事理)를 분별하고, 나아가 불법의 진실한 의의를 깊이 체득한 바의 존귀한 공덕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을 불과 21세, 비록 우에노의 향주이기는 해도, 대성인님께서 「현인 」이라고 현시하신 것에 당시의 상황을 깊이 생각하면서, 대성인님의 신뢰가 깊으셨다는 것을 배찰합니다. 그 의미에서도 도키미쓰(時光)님은 이 대성인님의 편지로 분기하셨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대성인님께서 고안(弘安) 5년 (1282)에 입멸하실 때까지의 사이에 실은 40여 통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도키미쓰님은 대성인님에게서 편지를 받으셨습니다. 도키미쓰(時光)님은
「자신은 탈 말 없고, 처자(妻子)는 걸칠 옷 없도다.」 [『上野殿答書(우에노전답서)』․1529]
라고 하듯이 관헌의 강압 때문에 한때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몸을 다 짜내서 돈의 공양(供養), 혹은 그때 그때 여러 가지 작물 등의 공양을 미노부(身延)의 대성인님께 보냈습니다. 지금은 교통편도 좋습니다만, 당시는 우에노에서 미노부까지 심부름꾼을 보내는 데에도, 교통 상황도 대단히 불충분한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항상 대성인님께 공양해 드린 것에 도키미쓰님의 깊은 의지를 배견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님께서 입멸하신 뒤 닛코상인(日興上人)께서 7년간 미노부산에 거주하셨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고 특히 지두(地頭)였던 하기리 사네나가(波木井實長)와 니코(日向)라는 방법(謗法)을 용인하는 그릇된 신앙을 지닌 승려의 광혹(誑惑)에 의해서 미노부산이 대방법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에는 네 개의 방법이 있는데, 그런 일 중에 있어서 닛코상인께서 혈루(血淚)의 경계에서 간효(諫曉)를 하셨습니다만, 하기리 사네나가의 방법(謗法)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느 곳이더라도 성인(聖人)의 어의(御義)를 이어서, 세상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도리인 것이외다.」[『하라전답서(原殿答書)』일련정종성전(日蓮正宗聖典)560]
라는 뜻으로써,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미노부를 이산(離山)하시어 이 후지(富士)의 땅으로 오셨습니다. 현재의 시모노보(下之坊)가 당시의 난죠가(南條家)와 관련이 있는 건물이라고 생각되는데, 닛코상인께서는 처음에 거기서 한 동안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난죠 도키미쓰님의 정법호지의 의지로써, 현재의 다이세키지(大石寺)의 땅, 즉 오이시가하라(大石原)의 땅을 여러 가지로 개척하고 정지(整地)하여 다이보(大坊), 무쓰보(六壼) 등이 지어졌습니다. 무쓰보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다시금 지어드렸습니다만, 당시는 이 무쓰보와 대성인님의 본존님을 안치해 드리는 어영당(御影堂)의 두 건물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기에서 점점 발전해 왔습니다만, 당시 이미 니치모쿠상인(日目上人)의 렌조보(蓮境坊) 닛슈(日秀), 혹은 쟈쿠니치보(寂日坊) 닛케(日華)등의 분들도 각각 방(坊)을 지으셔서 총본산의 외호(外護)를 맡으셨습니다. 그 후 더욱 정비가 되어 오늘날과 같은 어영당(御影堂)에서 내려와서 탑중(搭中) 12개방이 표탑중(表搭中)으로써 존재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성인님의 불법이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존립에 의해, 나아가 그 근본인 총본산 다이세키지(大石寺)가 있음으로써 올바르게 전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대성인님의 불법이 본문계단의 대어본존님을 근본으로 하는 삼대비법(三大秘法)의 정법이 홍통이며, 그것을 또 조금도 그르침 없이 올바르게 받으신 닛코상인님의 유아여아(唯我與我)의 경계에 있어서의 불법의 호지(護持)가 있어서, 비로소 여기에 존립의 기초가 구축되었습니다만, 다시 그것에 더하여 그 토지를 공양해 드리고 또 건물을 공양해 드려 근본의 대법(大法)의 기초를 여는 바의 외호(外護)를 하신 개기단다(開基檀那), 난죠 도키미쓰(南條時光)님의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난죠 도키미쓰님의 신심이 없어진다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이세키지(大石寺)가 존립하지 못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즈(伊豆)의 난죠향(南條鄕)에서 이쪽으로 영지가 바뀌어, 지두(地頭)로서 부친이신 난죠 효에시치로(南條兵衛七郞)님이 이 우에노에 오셨고 도키미쓰님이 그 뒤를 이으신 것인데, 난죠 효에시치로님은 분네이(文永) 2년(1265)에 서거하셔서 대성인님께서도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 즉 교통사정 혹은 연락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늘날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한때는 법화(法華)의 신자(信者)가 되었는데, 그 후는 어찌 되었는가.」라고 매우 신경을 쓰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10년 정도 지나서 대성인님도 여러 가지 법난(法難)이 사그라지고 미노부에 입산하시게 되어, 닛코상인에게 난죠 효에시치로님의 성묘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겐지(健治) 연간의 초기부터 난죠 도키미쓰님이 이 대성인님의 불법을 직접 만나서, 여러 가지 어지남을 하사 받음과 동시에 여러 가지 공양을 올리고 불법외호(佛法外護)를 하신 것을 배견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면에서 오늘날 총본산을 중심으로 하여 대성인님의 유일한 올바른 불법으로써 일련정종의 가르침이 세계를 향해 광선유포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근본이 난죠님의 불법외호의 신심(信心)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깊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에서 오늘은 난죠 도키미쓰님의 상월명일기의 법요를 봉수(奉修)하여 그 추선(追善)과 보은(報恩)에 이바지한 바입니다. 도키미쓰님은 「자신은 탈 말 없고」라는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대성인님께 자신의 몸을 다 짜낸 공양을 하셨는데, 이 의지에 의해서 비로소 불법이 올바르게 전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오늘 5월 1일에 총본산에 참예하셨다는 인연에서도, 꼭 도키미쓰님의 신심을 모범으로 삼아서 앞으로도 더욱 더 정진하실 것을 진심으로 기념 드리는 바입니다.

(5월 광포창제회의 때, 2005년 5월 1일 총본산 객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