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법화

숙업에 대해서

스와료도 어존사
諏訪凉道 御尊師 

  종조(宗祖)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는 『持妙法華問答抄 (지묘법화문답초)』에
「오직 선세(先世)의 업인(業因) 에 맡겨 영위(營爲) 할지어다.」(어서 29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달은 이 어문(御文)을 배독하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이 어문을 잘못 배독하면 대단히 잘못된 사고방식이 생기고 맙니다. 즉 과거(過去)의  업(業)에 맡겨 금세(今世)[금생(今生)]를 보내라 라고 읽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든 과거의 「숙업(宿業)」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되어 버려, 모든 일에 대해 체념하는 생각이 생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포자기해 버리기 쉽습니다. 또 모든 일에 대해 소극적인 생활방식으로 되고 말겠지요.
  이 어문은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어문을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부처님 훈계의 금언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간요(肝要) 합니다. 즉 선세(先世)의 업인(業因)을 깨닫고 더구나 이것을 극복해서 산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불퇴(不退)의 신심(信心)과 신념(信念)을 갖고 일체를 개척해 간다고 하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님의 성의(聖意)라고 배견하는 바입니다. 이「영위(營爲) 할지어다.」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선세(先世)의  업인(業因)」에 의한다 란

  결론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만, 우선 「선세(先世) 의  업인(業人)」으로 인해서 사람의 현재 모습이나 입장에는 여러 가지 처지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현재가 풍족하다던가 가난하다던가, 또 건강하다던가 병약하다던가, 혹은 또 수명이 길다던가 짧다던가, 능력이 뛰어나다던가 열등하다던가, 또는  미모의 소유자라던가 그렇지 않다던가, 실로 다양한 차이가 있으므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행운(幸運)·불운(不運), 행복(幸福)·불행(不幸) 모두가  과거(過去)의  업인(業因)으로 인한 것은 확실합니다.
  불법(佛法)에서는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因果)를  설 하므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분이 다 아실 걸로 생각합니다. 『開目抄 (개목초)』에는 유명한
「심지관경(心地觀經) 에 가로되 『과거(過去)의  인(因)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現在) 의 과(果)를  보라, 미래(未來)의 과(果)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現在)의  인(因)을 보라.』」(어서 571)
라는 말씀이 있으며,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因果)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인(原因)이 없는 결과(結果)나 현증(現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에서는 우연이라든가 기적이라는 사고방식은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과에 대한 원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인식하던 않던, 일체 모든 것이 인과의 관계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계(人間界)의 모습 모든 것에 걸쳐 인과의 작용이 있다는 것은, 확대해서 말하면 모든 생명현상에 걸쳐서 인과의 관계가 존재한다 라는 것이 됩니다. 즉 십계(十界)의 차별의 현상 모두가 인(因) 위의 과(果)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인간의 처지나 형편이 여러 가지인 것도, 과거의 생명으로부터 나타나는 과보(果報)와 그 작용에서 오는 현증의 하나 하나라는 것입니다.

모두 과거의 일심(一心)의 소작(所作)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를 불법(佛法)에서는 「오음(五陰)」이라고 합니다. 오음이란 「생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써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색심(色心)이라는 것입니다. 색심이란 또 몸(身)과 마음(心)입니다. 그 몸도 다시 마음의 소작(所作)으로 인해 여러 가지 과보를 나타냅니다. 어서에서는
「최초(最初)의 일념(一念) 전전(展轉)해서 색보(色報)를 이룬다. … 지옥(地獄)의 몸(身)이라고 해서 동연맹화(洞然猛火) 속의 맹렬한 불꽃으로 됨도, 내지(乃至) 불계(佛界)의 몸(體)이라 해서 색상장엄(色相莊嚴)의 몸(體)으로 됨도 오직 이 일심(一心)의 소작(所作)이니라.」(어서 11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음 줄에
「이것에 의해 악(惡)을 일으키면 삼악(三惡)의 몸(身)을 느끼고, 보리심을 일으키면 불(佛) 보살(菩薩)의 몸(身)을 느끼느니라.」(어서 112)
라고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사람은 과거에  여러 가지 색심(色心)을 가졌고 선악(善惡)의 마음을 일으켜 왔습니다. 인간의 과보란 그 스스로 만든 업인(業因)·업상(業相)으로 인해 또 오늘날 자신의 심신(心身)을 받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법(佛法)이 설 하는 도리(道理)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과거의 선배의 말씀에서 비유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예를 들어 평당 몇 십 만원하는 싼 재료로 지은 집은 거칠고 촌스럽고 위험하며 오래 가지 못하고, 평당 몇 백 만원이나 들여 지은 가옥은 화려하고 견고하며 오래 갈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과보(果報)도 역시 그렇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오음(五陰)[색심(色心)]이라는 인간의 구성요소가 행여나 악업(惡業)을 만들고 있었다면, 현재의 인생이 악업의 업력(業力)에 의해 꾸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선업(善業)을 만들고 있었다면, 또 선업의 업력에 의해 나아가는 것도 당연합니다. 선악(善惡)을 소재로 하여 말씀드렸지만, 요(要)는 과거의 업인(業因)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조잡한 재료를  모아서 지은 집은「거칠고 촌스럽고 위험하며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처럼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서 완성되는  집의 상태는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복운(福運)이나 복덕(福德), 선근(善根)이나 공덕(功德)이라는 훌륭한 덕(德)을 가진 사람은 바로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자재를 모아서 지은 가옥과 같은 것으로, 완성된 건물이 「화려하고 튼튼하며 오래 간다.」는 것은 분명하겠지요.

「선세(先世)의 업인(業因)에 맡겨 영위(營爲)할 지어다」의 성의(聖意)란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만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 「선세(先世)의 업인(業因)에 맡겨 영위(營爲)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성의(聖意)는  현재의 과보(果報)에  따라서, 더구나 「영위(營爲)할지어다.」란 현재의 과보를 차근차근히 밝혀내고, 일체를 불법(佛法)에 몸을 맡겨서 영위(營爲)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튼튼하고 오래 간다.」고 하는 집도 언제까지나 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도 하지 않고, 수선도 하지 않고, 비바람을 계속 맞으면 언젠가 반드시 완전하게 썩어버리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지금 부귀한 신세라고 해도, 여러 가지 덕(德)이나 훌륭한 과보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예를 들면 성처럼 견고한 건물이라도 언젠가는 무너져 완전히 썩어 부서져 버리는 것처럼 과보는 멀지 않아 다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아무리 값싼 재료로 얼렁뚱땅 지은 집이라도 가족이 힘을 합쳐서 자주 청소하고, 자주 상한 곳을 수선하고, 자주 비가 새는 곳을 고치고, 큰비나 센바람에도 잘 대처해서 굳게 지켜 간다면, 몇 십 년이라도 버틸 수 있습니다. 확실히 사람의 처지에는 여러 가지 불행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약하며 덕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처지의 사람일지라도 올바른 신앙과 끊임없는 노력의 힘이 작용한다면 반드시 강한 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대성인께서 말씀하신 뜻은 오로지 「선세(先世)의 업인(業因)을 깨닫고」 그 위에 서서 「영위(營爲)할지어다」라고 배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상에서 이것을 생각하면, 비록 복운(福運)이 없는 미력한 처지의 사람일지라도 일단 신심에 결정(決定)한다면 본존님의 불력(佛力)·법력(法力)을 받는 경계(境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수지하는 의미도 이해되시겠지요.

행(幸) · 불행(不幸)은  업인(業因)에 의한다

  사람의 행(幸)·불행(不幸)을 나타내는 업(業)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자신의 소행(所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업인(業因)이라고 합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말법탁악(末法濁惡)에 태어나는 중생은 과거의 방법심중(謗法深重)의 중생뿐이라는 것이므로, 생명의 깊숙한 곳에 불행의 업인이 내재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서에는
「말대(末代)의 범부(凡夫)는 어떻게 하더라도 악도(惡道)를 면하기는 어려우니라.」(어서 283)
라고 설 해져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 일시적인 부귀(富貴)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도 이윽고 복운(福運)이 다하는 때가 왔다면 마찬가지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과거의 업인(業因)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의 업인을 깨닫는다는 것은 과거의 업인을 알고, 게다가 이것을 정화(淨化)하는 유일한 방법이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의 불법(佛法)을 추구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의 어서(御書)에는 「악(惡)을 일으키면 삼악도(三惡道)의 몸(身)을 느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惡)의 마음이란 십악(十惡)의 마음이나 오역죄(五逆罪) 등인데, 더욱 근본적인 악의 마음이란  정법비방(正法誹謗)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에 의해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 등의 삼악도(三惡道)의 몸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  보리심을 일으키면 부처와 보살(菩薩)의 몸을 느낀다고 설 해져 있습니다. 이 보리심이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추구해야만 하는  마음상태입니다. 보살이란 이 보리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보살의 경계를 얻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보리심은  이리(二利)에 걸친 심지(心地)로써 불법(佛法)을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리(二利)란 자리(自利)·이타(利他)란 것으로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보살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즉 첫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둘째 번뇌무수서원단(煩腦無數誓願斷), 셋째 법문무진서원지(法門無盡誓願知), 넷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입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는 이타(利他)에 해당하고, 남은 셋은 자리(自利)에 해당합니다. 첫 번째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를 우리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일체의 사람들을 정법(正法)으로 이끄는 행위입니다. 즉 절복(折伏)만이 이타의 행이고 보리심의 발로(發露)입니다. 자행(自行)이란 근행(勤行)·창제(唱題) 등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갈래에 걸친 일체의 자행이 있습니다만 여러분들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들 자행화타에 걸친 신행이야말로 보리심의 발로라고 이해하게 될 때 일체의 경계가 열려갑니다.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라

  몸의 복운(福運)도 죄장(罪障)도 모두 마음에  일으키는 일념(一念)이 기본이 되고, 일념(一念)의 변화가 또 각각의 몸을 형성해서 경계(境界)를 결정해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음에 본존님을 믿고 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행위가 얼마나 존귀하고 고마운 것인가,  더 나아가 사람들을 향해서 절복을 행하고 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알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의해 사람들은 불(佛)·보살(菩薩)의 경계를 나타내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자행화타에 걸친 신심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소행(所行)입니다. 어은존 닛켄상인 예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용(地湧)의 보살(菩薩)이라는 대자각으로써, 나 한 사람 일어서서 올해에  반드시 한 사람 이상 절복(折伏)의 연(緣)을 행하겠다는 서원(誓願)을 대어본존(大御本尊)님에게 기념해 올리는 일이야말로 간요(肝要)합니다. 그 각오로써 행하는 행동과 창제에, 자칫하면 육도(六道)의 미혹 속에  빠지기 쉬운 불행(不幸)을 부르는 생명이, 구원겁래(久遠劫來)의 상주(常住)의 공덕(功悳)에 가득차 넘치는 불가사의한 존고(尊高)의 생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2000년 1월 1일) 또
「우리들이 그 하종(下種)의 일념(一念)으로써 묘법(妙法)을 부르는 곳에, 과거원원겁(過去遠遠劫) 이래의 방법죄장(謗法罪障)이 소멸되고, 또 현재만만(現在漫漫)의 방법(謗法)의 인연(因緣)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심중(心中) 및 육체(肉體)의 깊숙한 곳에 대성인님의 대법(大法)이 심어져 그 대이익을 받는 것입니다.」(1996년 3월 30일)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어지남(御指南)대로 대어본존(大御本尊)님께 절대신(絶對信)·결정심(決定心)으로써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無妙法蓮華經라고 강성하게 불러간다면  구원겁(久遠劫) 이래(以來)의 상주(常住)의 공덕(功悳)에 가득차 넘치는 불가사의한 존고(尊高)의 생명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어지남(御指南)만큼  고마운 말씀은 없습니다. 불행(不幸)을 부르는  어떤 죄장(罪障)도 소멸할 수 있다는  창제(唱題)의 일행(一行)에  갖춰진 이익의 고마움은  불가사의하다고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선세(先世)의  업인(業因)에  맡겨 영위(營爲)할 지어다.」라는  심의(深意)를 우러르며, 인생의 곤란을 극복하고 참된 행복의 경계를 확립하기 위해서 한층 정진(精進)할 것을 서로 맹세합시다. 대한민국의 신도 여러분께서 더욱 정진하시고 행복하실 것을 빌며 이번 달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